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돌프 히틀러/평가 (문단 편집) == 정치적 능력 == >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갈 무렵, 어떤 사람이 스탈린에게 히틀러가 "정신병자였는지 아니면 모험가였는지"에 대해 질문했다. 이에 스탈린은 이렇게 대답했다. > '''"나는 그가 모험가였다는 점에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그가 미치광이였다는 점에 동의할 수 없다. 히틀러는 재능있는 사람이었지. 단지 재능있는 자만이 독일 민족을 통일할 수 있는 법이야!"'''[* 출처- Robert Dallek, The Lost Peace: Leadership in a Time of Horror and Hope, 1945-1953, Harper Perennial; Reprint edition (December 5, 2011), p.9] 객관적으로 보면 '''히틀러는 정치적으로 [[김일성|권력을 잡는 능력은 매우 뛰어났다]]'''. 히틀러가 아무 기반도 없는 무능력자였다면 독일 노동자당에서 당수가 될 수 없었을 것이고,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은 맥주홀 폭동 이후에 그저 수없이 사라져간 듣보잡 극우정당 중 하나로 끝장났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뿐만 아니라 히틀러가 주동한 뮌헨 폭동 실패 이후에 많은 당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또는 당을 떠나는 등 나치당은 거의 망한 것으로 보였으나, 히틀러는 놀랍게도 쿠데타가 아닌 합법 노선으로 집권 전략을 바꾸어서 결국 집권에 성공한다. 여기서도 나치당에서 재건 전에 모든 시도를 해봤으나 지지율이 오히려 떨어졌고[* 6.5%에서 3%로], 히틀러 없이는 구심점도 없고 선동적인 연설로 흥행도 되지 않았던 점도 작용한다. 사실 히틀러가 한창 떠오를 때에도 그를 길거리에서 난동 피우는 정치깡패의 우두머리라며 무시했던 정치인들이 많았다. 이는 좌우를 가리지 않아 독일 사회민주당과 독일 공산당이 히틀러를 과소평가해서 서로 싸워대는 바람에 정당이 해산당하는 운명을 맞아했고,[* 이렇게 정권을 빼앗긴 교훈으로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범중도파~좌파를 아우르는 [[인민전선]]이 결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 우파도 별다를 바는 없어서, [[아데나워]]가 쾰른 시장에 당선되었을 때 나치당을 한날 군소정당 정도로 여겨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든가,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히틀러를 탐탁치 않게 여겨 히틀러를 총리로 지명하는 걸 거부해서 집권하는 걸 노골적으로 방해했다는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독일의 정통 보수세력, 수구세력에서도 히틀러를 하찮게 여겼던 정치인들이 많았고, 히틀러가 집권한 원인도 보수정치인들이 히틀러를 방패막이로 삼으면 경제대공황 발발에 대한 책임을 지는 걸 피하면서 집권을 연장할 수 있고, 거기에 더해 행정경력이 없던 히틀러를 주물러서 꼭두각시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결국 이들은 대부분 히틀러의 정치력에 차례차례 굴복하거나 숙청되었고, 파펜을 비롯해 히틀러를 이용하여 정권을 연장하려던 정치인들은 뒷방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어찌보면 히틀러의 가장 뛰어난 능력 중 하나가 이렇듯 권력을 잡는 정치질 능력이었는데, 이를 얕보고 이용하려다가 피본 사람들이 많았다. 히틀러는 필요에 따라 다른 정치인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줄도 알았고 비위도 맞출 줄도 알았다. 협박이나 겁박뿐만 아니라 다른 정치인을 살살 구슬려서 타협을 할 줄도 알았다. 많은 사람들에게 단상에서 미치광이처럼 연설을 하는 선동가 히틀러의 모습이 익숙하겠지만 밀실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협잡을 하거나 권력을 잡는 정치 기술이라는 측면에서 히틀러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나치당 집회 시 히틀러가 없을 때나 연설 금지령을 먹었을 때는 모이는 사람 숫자 단위와 모금액이 크게 차이가 났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1년여의 수감기간 후에 나치당이 재건될 때에도 별다른 반대 없이 당내 절대적 존재로 재추대된다. 물론 1930년 선거에선 지지율이 3.0% 미만으로 떨어지는 시련도 있었다. 집권과정에서는 미국발 경제 대공황과 대통령 비상체제라는 예측 불가능한 운빨이 작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회가 왔을 때 이를 놓치지 않고 잡아 챈 것도 능력이다. 당장 2.6%에 불과한 득표율을 기록하고도 당내에서 히틀러가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만 해도 그렇다. 심지어 히틀러가 당권을 잡은 1921년부터 몰락하기 직전인 1945년 4월까지도 히틀러에게 대놓고 도전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 정도로 그의 권위는 매우 확고했다. 한때 총애를 받다 숙청된 한프슈탱글이나 [[오토 슈트라서]]까지도 히틀러의 이런 능력을 인정한다. 학습이나 지성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닌 본능이나 감으로 상대방이나 대중심리를 잡아냈다고. 누가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있는지 세력균형이 어떠한지 약점이 무엇인지 잘 파악해서 집권 시에도 블러핑으로 상대방을 현혹시켰고, 상대진영의 병림픽과 세력구도 역학관계를 잘 파악했으며 마치 오늘날의 '''[[북한]]'''을 연상케하는 벼랑 끝 전술과 도박에 가까운 무모함에 질린 상대방이 굴복하게 만드는 역량도 뛰어났다. 이러한 전법은 오스트리아와 체코 합병 시까지 잘 통했다. [* 물론 그 배경에는 북한과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의 강대국인 독일의 국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지만.~~북한 1패~~] 애초에 복잡한 독일의 정치지형을 분석하고 각 정파의 장단점을 분석해서 집권전략으로 삼은 것도 보통 지략이 아니면 힘들다. 그를 다른 정파의 수장들이 과소평가하기는 했으나, 어쨌든 집권 후에 공산주의자들과 유대인들을 공적으로 만들며 극우뿐만 아니라 우익들을 모두 휘어잡아 총통에 오른 것을 보면 그가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한 시대적 흐름을 잘 탄 운빨뿐만이 아니라 히틀러의 정치적 재능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히틀러가 만약 (수정의 밤 이전인) 1938년에 [[오스터 음모사건|암살]]당해 사망했더라면 그는 독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가로 남았을 것이다.''' 이건 <히틀러 평전>을 쓴 요아힘 페스트가 하는 말이다. 결국 전쟁과 전쟁 범죄가 문제. 요아힘 페스트는 히틀러를 옹호하지 않는 사람이니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히틀러 연구자 [[이언 커쇼]]는 히틀러를 현실과 그리 동떨어진 인물이 아니며 기억력이 매우 비상했고 두뇌회전이 빨랐던 사람으로 평가했다. 실제로 흔히 주변의 아첨꾼들한테만 히틀러의 말이 먹혀든 것처럼 생각하지만 냉정하고 비판적인 노련한 정치인과 외교관들도 사안을 신속하게 파악하는 히틀러의 비상한 두뇌에 혀를 내둘렀다는 증언이 많다. 1933년 총리 취임 후 국제 무대에서 히틀러가 거둔 몇 차례의 승리는 영국,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이 히틀러를 다시 보게 만들었다. 히틀러의 무기는 국내 정치에서와 마찬가지로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식의 과감한 승부사 기질이었고, 나치당 선동가 시절부터 즐겨 써 온 공갈 협박도 잘 먹혀들었다. 그러나 계속된 외교적 승리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연이은 군사적 승리로 인해 히틀러는 스스로가 ‘무오류의 인간’이라는 자기 확신에 빠져들었으며 모든 일이 자신의 생각대로 풀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점점 더 큰 무리수를 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무모한 도박의 결과는 [[독소전쟁]]을 통해 한계를 드러냈고, 이전까지 출세길을 열어준 '전부 아니면 전무' 식으로 타협을 하지 않던 자신의 지도력을 신봉하던 히틀러는 궁지에 몰렸다고 협상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색이 짙어진 불리한 상황에서도 결코 협상이나 타협은 없다는 비타협적인 태도를 고수하여 그와 제국을 파멸로 몰고 갔다.~~이래저래 최고의 독재자도 오만해지면 똑같이 망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